건강

아이들 비상! 성홍열 환자 2.5배 폭증..유치원·학교 덜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주로 발생하는 급성 발열성 질환인 성홍열 환자가 최근 크게 늘어 방역 당국이 주의를 당부하고 나섰다. 특히 올해 신고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의 2.5배에 달하는 등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어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4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 말까지 전국에서 신고된 성홍열 환자는 총 3809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506명과 비교하면 2.5배 증가한 수치다. 성홍열은 보통 겨울과 봄철에 유행하며, 매년 전체 환자의 80% 이상이 10세 미만 소아에서 발생한다. 올해 역시 5월 말까지 신고된 환자 중 10세 미만 소아가 86.8%를 차지하며 어린이 환자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성홍열은 A군 사슬알균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갑작스러운 고열과 인후통, 두통, 구토, 복통 등의 증상으로 시작된다. 이후 12~48시간 내에 피부에 특징적인 발진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 성홍열은 3~4년 주기로 큰 규모의 유행이 반복되는 경향을 보였다. 가장 최근 대규모 유행은 2017년으로, 한 해 동안 2만 2838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질병관리청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시행된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가 이러한 주기적인 유행 패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방역 당국은 성홍열 확산 방지를 위해 지자체와 일선 의료기관에 주의 사항을 안내하고 예방 및 관리를 강화하도록 요청했다. 특히 유치원, 어린이집, 학교 등 소아 집단 시설에서의 감염병 예방 수칙 준수가 강조된다. 손 씻기, 기침 예절 지키기는 물론, 아이들의 손이 자주 닿는 환경 표면을 주기적으로 소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부모들에게는 자녀에게 갑작스러운 발열, 인후통, 발진 등 성홍열 의심 증상이 나타날 경우 신속하게 의료기관을 방문해 진료를 받도록 당부했다. 성홍열로 진단받은 경우, 항생제 치료를 시작한 후 최소 24시간 동안은 전염성이 유지될 수 있으므로 유치원이나 학교 등 집단 시설 등원을 중단해야 한다. 적절한 항생제 치료 24시간 이후에는 전염성이 거의 없어지지만, 처방받은 항생제(보통 10일 처방)는 임의로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복용하는 것이 완치와 합병증 예방에 중요하다.

 

지영미 질병관리청장은 "성홍열은 항생제로 비교적 쉽게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지만, 조기 진단과 신속한 치료, 그리고 예방 수칙 준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학부모님들과 집단 시설 관계자분들께서는 예방 관리 수칙을 철저히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