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산업

미 관세 폭탄 속 살아남은 K수출…한국 수출 5% 반등

 이달 1일부터 10일까지 한국의 수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발 고강도 관세 압박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승용차, 선박 등 주요 주력 산업의 선전이 수출 상승을 견인한 결과로 풀이된다. 다만, 전체 6월 실적에 대해서는 향후 추이를 좀 더 관망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관세청이 11일 발표한 통관 기준 잠정치에 따르면, 이달 초 10일간의 수출액은 총 154억 75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5.4% 늘었다. 조업일수가 5.5일로 지난해 같은 기간 6.0일에 비해 0.5일 적었음에도 일평균 수출액은 15.0% 증가했다. 이는 기업들이 보다 집중적으로 생산과 수출에 나섰음을 시사한다.

 

월별 수출 실적은 올해 2월부터 4월까지 세 달 연속 증가세를 보이다 5월에는 감소세로 전환된 바 있다. 특히 5월 수출 감소는 미국의 고강도 관세 정책이 본격 시행된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6월 초 수출 증가에도 불구하고, 관세 부담과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 등의 요인으로 월말까지의 수출 실적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품목별 수출 현황을 보면, 반도체가 36억 29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2.0% 급증했다. 이는 반도체 산업이 여전히 한국 수출을 견인하는 핵심 산업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승용차 수출도 13억 달러로 8.4% 증가했고, 선박 수출 역시 8억 9600만 달러로 23.4% 크게 늘었다. 이밖에 자동차 부품(12.1%), 컴퓨터 주변기기(38.3%), 정밀기기(5.4%) 등의 수출도 증가세를 기록했다.

 

반면 석유제품(-20.5%), 철강제품(-3.9%), 무선통신기기(-43.1%), 가전제품(-30.0%) 등은 수출이 줄어들었다. 이는 글로벌 경기 둔화와 특정 품목에 대한 수요 감소, 경쟁 심화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지역별 수출 동향에서는 중국(2.9%), 미국(3.9%), 유럽연합(EU, 14.5%)으로의 수출이 증가한 반면, 베트남(-9.5%)과 일본(-5.9%) 등 일부 아시아 국가로의 수출은 감소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시장별 수요 변화에 따른 현지 수요 차별화 현상을 반영한 결과로 분석된다.

 

한편, 이달 1\~10일 수입액은 171억 830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11.5% 증가했다. 수입 품목 중에서는 반도체(15.2%), 기계류(16.8%), 가스(36.0%)가 증가했고, 원유(-9.1%)와 석유제품(-5.1%)은 감소했다. 가스 수입 증가는 에너지 수급 안정화 노력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수출입 동향에 힘입어 무역수지는 17억 8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국내 무역수지는 2023년 6월 이후 19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해 왔으나, 올해 1월 한 달 동안 적자로 전환된 바 있다. 이후 2월에는 다시 흑자로 돌아섰으며, 3월(49억 8000만 달러), 4월(48억 8000만 달러), 5월(69억 4000만 달러)에도 꾸준한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6월 초 수출 증가가 긍정적인 신호임은 분명하지만, 미국의 관세 정책과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 등이 수출 실적에 계속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어, 앞으로 발표될 전체 6월 수출 실적에 대해 신중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특히 주력 산업의 경쟁력 유지와 신시장 개척, 공급망 안정화가 향후 수출 증대의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이처럼 한국의 수출은 주요 품목과 지역별로 상이한 양상을 보이며, 미·중 무역 갈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복합적인 외부 변수와 함께 국내외 경제 상황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정부와 기업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전략적인 대응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