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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가 인정한 이강인 골 퀄리티.."비슷한 슈팅, 전혀 다른 결과"

 이강인(24·파리 생제르맹)이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쿠웨이트전에서 터뜨린 골이 인도 축구 전문 매체에 의해 집중 조명됐다. 이 매체는 비슷한 장면에서 득점에 실패한 자국 선수와 이강인의 골 장면을 비교하며 ‘퀄리티의 차이’를 강조했다.

 

인도 축구 전문 매체 IFTWC는 12일(한국시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최근 아시아 축구 무대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두 선수의 장면을 캡처해 공개했다. 하나는 10일 열린 2027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3차 예선 C조 2차전 인도와 홍콩의 경기에서 인도의 리스톤 콜라코(모훈 바간)가 왼발 슈팅 기회를 잡은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같은 날 한국과 쿠웨이트의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B조 최종전 경기에서 이강인이 골 지역 왼쪽 모서리 부근에서 왼발 슈팅을 시도한 장면이었다.

 

두 장면 모두 골문 근처 왼쪽 코너에서 왼발 슈팅 기회를 포착한 점은 일치했으나, 상황은 달랐다. 콜라코는 골키퍼와 1대1로 맞서면서도 수비수의 간섭 없이 슈팅을 시도할 수 있었던 반면, 이강인은 상대 수비와 매우 근접한 상태에서 슈팅을 해야 했다. 득점 가능성으로만 보면 콜라코의 상황이 훨씬 유리해 보였으나 결과는 달랐다.

 

 

 

콜라코의 슈팅은 골대를 완전히 벗어나 관중석 쪽으로 향하며 득점에 실패했고, 인도 팀은 결국 0-1로 패했다. 반면, 이강인은 강하고 낮게 깔린 왼발 슈팅으로 쿠웨이트 골망을 흔들며 1-0 리드를 굳히는 쐐기골을 터뜨렸다. 이 골은 한국팀의 승리를 확정짓는 결정적 장면이 되었다.

 

IFTWC 매체는 두 장면을 나란히 배치해 “콜라코의 슈팅은 골대 안쪽으로 향하지 못했지만, 이강인의 슈팅은 그대로 골로 연결됐다”며 “이것이 바로 선수 간 퀄리티의 차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비슷한 위치와 상황에서도 선수 개개인의 기술과 집중력 차이가 경기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였다. 다만, 일부 네티즌들은 “코끼리와 개미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며 “이강인과 콜라코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강인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반응을 보이며 비교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이강인은 이번 월드컵 아시아 예선 2연전에서 두 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고 있다. 지난 이라크전에서는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쿠웨이트전에서는 직접 득점에 성공했다. 특히 손흥민(토트넘)이 발 부상 여파로 쿠웨이트전에 교체로 출전한 가운데 이강인은 이번 2·3차 예선 기간 동안 대표팀 공격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이강인은 총 1235분을 뛰어 황인범(페예노르트·1397분), 조현우(울산 현대·1297분)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출전 시간을 기록 중이다. 득점 부문에서도 손흥민(10골)에 이어 공동 2위(5골)를 차지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이강인의 이번 활약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으며, 차세대 대표팀 공격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향후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국내외 축구 팬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