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큐브

MZ 사로잡겠다던 한동훈 '얼굴 돌돌이'..묘수 vs 악수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최근 유튜브 라이브 방송(라방)을 통해 지지층과의 소통을 강화하며 책임당원 가입을 적극 독려하고 나섰다. 이는 차기 당대표 출마를 염두에 둔 행보로 풀이되며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 전 위원장은 지난 15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약 50분간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지지자들의 실시간 질문에 답하는 한편, 상당 시간을 할애해 노래를 추천하고 직접 기타를 연주하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는 방송 중 "여러분의 목소리를 반영해서 보수 정치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책임당원에 많이 가입해 달라"며 "그래야 정치가 바뀌고, 당이 민심에 더 부합하며 이재명 정부를 견제하고 대한민국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하며 당원 가입을 거듭 호소했다.

 

한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총선 이후 '라방 정치'를 통해 20·30세대 등 젊은 층과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차 안이나 집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실시간 채팅을 읽으며 소통하고, 선호하는 음악이나 옷 정보를 공유하며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최근 그의 '라방 정치' 중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것은 일명 '돌돌이' 영상이었다. '얼굴에 돌돌이하는 한동훈입니다'라는 제목의 이 영상에서 그는 고양이 털을 제거하겠다며 안경을 위로 올리고 얼굴 곳곳에 먼지 제거용 테이프, 즉 '돌돌이'를 굴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는 "저는 고양이 털이 많으면 주로 돌돌이를 쓴다. 이렇게 하면 좀 낫다. 얼굴도 이렇게 한다"고 설명하며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5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관심을 끌었으나, 이를 본 누리꾼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유쾌하고 친근하다", "진짜 고양이 집사 같다"는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AI 영상 같다", "젊은 척 무리한다", "기괴하다"는 등 부정적인 반응도 상당수 이어졌다. 개혁신당 이기인 최고위원은 한 전 위원장을 풍자하며 얼굴에 돌돌이를 사용하는 모습을 연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한 전 위원장의 향후 정치 행보, 특히 차기 당대표 출마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조언을 구한 사실이 알려졌다. 김 전 위원장은 JTBC와의 통화에서 한 전 위원장을 국민의힘 재건의 적임자로 보지만, 당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너무 서둘러 출마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조언을 건넸다고 밝혔다.

 

한 전 위원장 측 핵심 관계자는 "원내대표 경선이 끝난 후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는 입장이어서, 그의 최종 결정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친한계 내부에서도 당의 전면적인 개혁을 위해 출마해야 한다는 의견과, 내년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며 신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한 전 위원장의 선택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