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전쟁통에 사라졌던 '지옥의 재판관', 70년 만에 미국서 돌아온 사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약탈당해 70여 년간 이역만리 타국을 떠돌던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소장해왔던 조선 후기 불화 '신흥사 시왕도' 중 한 점인 '제10 오도전륜대왕도'가 국내로 반환되었다고 14일 밝혔다. 1798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흥사 시왕도는 망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저승의 열 명의 왕을 그린 불화로, 본래 총 10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 반환은 2020년 LA카운티박물관으로부터 6점을 돌려받은 이후, 나머지 4점의 행방을 추적해 온 노력의 값진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이번에 돌아온 '오도전륜대왕도'는 시왕(十王) 중 마지막 심판을 관장하는 열 번째 왕을 그린 작품이다. 오도전륜대왕은 망자가 저승에서 거치는 모든 심판을 마친 후, 그의 죄와 번뇌의 무게를 최종적으로 판결하여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길(육도윤회) 중 어느 곳으로 환생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림의 중앙에는 위엄 있는 모습의 오도전륜대왕이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 판관과 사자 등 여러 권속이 배치되어 저승의 엄숙한 심판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번 환수로 신흥사 시왕도 총 10점 중 7점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아직 행방이 묘연한 나머지 3점의 소재를 파악하고 환수하기 위한 노력에도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이번 성과는 어느 한 기관의 노력이 아닌, 민관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뤄낸 쾌거라는 점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본사인 조계종, 원래의 소장처인 신흥사는 물론, 속초시문화재제자리찾기위원회와 같은 지역사회의 시민단체까지 합심하여 끈질긴 설득과 협상을 이어왔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민간단체와 국가가 긴밀히 협력하여 성과를 거둔 좋은 본보기"라고 평가하며, 앞으로도 민간의 노력을 적극 지원하여 국외 문화유산 환수의 기반을 다져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이는 단순한 유물 반환을 넘어, 우리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한 사회 전반의 염원과 역량이 결집된 결과물이다.

 

환수를 결정한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측 역시 이번 반환에 대해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한국과의 지속적인 협력 의지를 밝혔다. 맥스 홀라인 관장은 "이 중요한 예술 작품의 반환을 위해 신흥사 등과 협력하게 되어 영광"이라며, "앞으로도 한국의 여러 기관과의 공동 노력을 통해 한국 예술에 대한 세계의 이해와 인식을 고취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약탈 문화재 반환이 종종 국가 간의 날 선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과 달리, 이번 사례는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협력적 파트너십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국제 사회에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