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의사도 놀란 '10g의 기적'…대장암 생존자 지긋지긋한 설사 멈추게 한 음식의 정체

 대장암은 수술로 암세포를 제거해도 끝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많은 생존자가 수술 후에도 수년간 설사, 변비, 가스, 점액 변 등 각종 배변 관련 증상으로 고통받으며 삶의 질 저하를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는 암의 재발이나 전이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불편을 초래하며 환자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가운데, 네덜란드 바게닝언대 연구팀이 대장암 생존자들의 오랜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효과적인 식단 해법을 제시해 주목받고 있다. 최근 국제 학술지 'JAMA Network'에 발표된 이 연구는 식이섬유가 풍부한 식단이 대장암 수술 후 겪는 배변 증상을 완화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연구팀은 'COLON 연구'라는 대규모 코호트 연구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10년간 네덜란드 11개 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은 1~4기 환자들을 최장 5년까지 추적 관찰했다. 진단 후 6개월, 2년, 5년 시점에 식단과 배변 증상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증상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진단 6개월 후에는 무려 46.7%의 환자가 장 관련 증상을 겪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며 다소 감소하기는 했지만 5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35.7%, 즉 생존자 3명 중 1명 이상이 불편을 겪고 있었다. 특히 수술 후 항암화학요법을 받은 그룹은 초기(6개월)에, 방사선요법을 받은 그룹은 장기적(2~5년)으로 증상을 더 흔하게 겪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의 핵심은 식이섬유 섭취량과 증상 완화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밝혀낸 데 있다. 분석 결과, 하루 식이섬유 섭취량이 10g 증가할 때마다 설사 증상을 겪을 유병률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사는 환자들이 겪는 가장 흔하고 고통스러운 증상 중 하나로,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주범으로 꼽힌다. 식이섬유 섭취는 이러한 설사 증상을 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진단 후 6개월과 2년 시점에서 점액 변의 유병률을 낮추는 효과도 보였다. 이는 과일, 채소, 통곡물, 콩류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품을 통해 고질적인 후유증을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다만 연구팀은 식이섬유 섭취가 무조건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식이섬유는 장내 발효 과정에서 가스를 유발할 수 있어, 과도하게 섭취할 경우 오히려 복부 팽만감과 같은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적당량'을 '자신에게 맞게' 섭취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배변 관련 증상이 있는 환자는 없는 환자보다 삶의 질이 낮았다"고 지적하며, "식이섬유 섭취가 일부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되므로,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고려한 맞춤형 식생활 개입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번 연구는 대장암 생존자들이 겪는 불편함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