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큐브

손흥민과 웃으며 대화했지만…가나 감독의 뼈아픈 평가 "한국, 일본 레벨엔 못 미쳐"

 가나 축구대표팀을 이끄는 오토 아도 감독이 아시아 2연전을 마친 뒤 한국과 일본의 전력에 대해 냉정하고 솔직한 평가를 내놓았다. 그는 일본을 '높은 레벨의 팀'으로 치켜세우면서도, 한국과 가나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선을 그었다. 아도 감독은 1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0-1로 석패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일본은 굉장히 강한 팀"이라며, "지난달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도 승리했는데, 브라질이 쉽게 지는 팀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이 얼마나 좋은 경기를 펼쳤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어느 팀을 만나도 자신들이 강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본다"면서 "레벨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과 가나는 아직 그 정도에 도달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자신의 소신을 가감 없이 밝혔다.

 

이날 경기 내용에 대해서는 양 팀이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아도 감독은 "우리도 볼 점유율을 높이며 기회를 만들었지만 살리지 못했고, 한국은 찾아온 기회를 잘 살려 승리했다"며 "결국 마무리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의 크로스와 코너킥 등 세트피스 상황이 위협적이었으며, 결국 크로스에 이은 헤더로 결승골을 내주었다고 설명했다. 가나 역시 주력 선수 다수가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타이트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을 여러 차례 선보였고, 두 번이나 한국의 골망을 흔들었지만 모두 오프사이드로 판정되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경기 내용은 팽팽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에서 희비가 엇갈렸다는 것이 그의 총평이었다.

 


또한 아도 감독은 3년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맞붙었던 한국 대표팀과 현재의 '홍명보호'를 비교하며 전술적인 변화를 예리하게 짚어냈다. 그는 "이번 한국팀은 3명의 중앙 수비수를 두면서 후방을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전체적으로 콤팩트한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3백 시스템으로 인해 한국이 특정 지역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가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가나 선수들이 언제, 누구를 압박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윙어가 압박을 가야 할지, 미드필더나 풀백이 가야 할지 혼선이 있었다"며, 이것이 전반전에 한국이 더 높은 볼 점유율과 많은 기회를 가져간 이유라고 설명했다.

 

경기 후에는 과거 독일 함부르크에서 감독과 선수로 연을 맺었던 손흥민과 그라운드에서 만나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아도 감독은 손흥민에게 승리를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고, 손흥민은 그에게 한국 방문 소감을 물었다고 전했다. 아도 감독은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고 서울이라는 도시도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답해줬다"고 말했다. 또한, 과거 함부르크에서 함께했던 차두리 현 화성FC 감독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손흥민에게 전화번호를 묻기도 했다고 밝히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