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내 아기에게 다른 엄마 젖이…산후조리원서 벌어진 충격 실화, 친자검사까지 갔다

 충청북도의 한 산후조리원에서 신생아가 뒤바뀌는 아찔한 사건이 발생해 산모가 직접 친자 확인 검사까지 나서는 등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산모 A씨는 지난 8월 31일, 생후 8일 된 자신의 아기를 보기 위해 휴대전화로 신생아실 CCTV인 '베베캠'을 확인하던 중 화면 속 아기의 모습이 평소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에 곧바로 신생아실로 달려간 A씨는 조리원 직원으로부터 자신의 아기가 다른 산모의 아기와 바뀌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받았다. A씨는 "전날 밤 마지막으로 본 딸의 얼굴과 너무 달라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정말 내 아기가 아니었다"며 "그 순간의 충격과 공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을 토로했다.

 

사건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A씨를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조리원 측이 자신의 아기를 다른 산모의 방으로 데려갔고, 해당 산모가 뒤바뀐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수유까지 했다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아기가 바뀐 것을 알게 된 다른 산모 역시 아기의 생김새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산후조리원에서 아기가 바뀌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A씨 부부는 이처럼 허술한 신생아 관리 시스템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당장 아기와 함께 퇴소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모유 섭취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조리원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는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해야 했다.

 


퇴소 이후에도 A씨 부부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잠시나마 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과,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부부를 극심한 스트레스로 몰아넣었다. 결국 A씨 부부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최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자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A씨는 "만약 내가 베베캠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아기가 바뀐 채로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한창 사랑을 줘야 할 시기에 부모 모두 끔찍한 충격에 빠져 아기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고 호소하며 눈물을 보였다.

 

논란이 커지자 산후조리원 측은 직원의 실수를 인정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조리원 관계자는 당일 오전 기저귀 교체 및 위생 처리 과정에서 속싸개에 붙어있던 이름표가 떨어졌고, 이를 다시 부착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신생아 발에 부착된 신상 정보 발찌가 있어 최종적으로 아기가 바뀔 일은 절대 없다고 강조했다. 조리원 측은 해당 직원에게 엄중 경고 조치를 내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직원용 이름표를 없애고 발찌 인식표로만 신상을 확인하도록 절차를 변경했다고 밝혔다. 더불어 A씨에게 조리원 비용 전액 환불 및 친자 검사 비용 지원 등의 보상을 제공했다. 그러나 A씨 부부의 민원을 접수한 관할 보건소는 관련 법규상 행정처분 대상이 아니라며 '행정지도' 조치에 그쳐, 신생아 관리 시스템에 대한 법적,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