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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맘' 사유리의 의외의 약점…"오픈 클래스? 영어라 못 껴요" 솔직 고백

 방송인 사유리가 아들 젠의 5살 생일을 맞아 특별한 홈파티를 열고, 이와 함께 최근 젠이 외국인 학교에 입학하며 겪게 된 예상치 못한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난 18일 사유리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젠의 생일 파티 현장을 공개했다. 그는 "요즘 생일 파티를 대부분 키즈카페에서 하지만, 집에서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며 아들을 위해 직접 파티를 준비하는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젠을 위해 이처럼 큰 규모의 파티를 열어주는 첫 경험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사유리는 제작진과 함께 풍선을 불고 집안을 장식하며 젠의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고,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과 엄마들로 집안은 활기로 가득 찼다.

 

파티는 성공적이었지만,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교육 환경 변화로 이어졌다. 젠이 최근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외국인 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한 사유리는 다른 엄마들에게 "어린이집이 끝나고 유치원으로 가게 되니 이전 엄마들과 자주 만나기 어렵지 않냐"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이에 다른 엄마들은 대부분 동네가 달라지면서 새로운 유치원의 학부모들과는 교류가 쉽지 않다고 답했다. 이는 사유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젠이 다니는 외국인 학교 학부모들과는 "전혀 교류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심지어 "연락처 자체를 모른다"고 고백해 놀라움을 안겼다.

 


사유리가 학부모들과의 교류에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언어의 장벽'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오픈 클래스' 같은 행사가 있긴 하지만, 모든 소통이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학부모들 역시 대부분 외국인이라,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사유리로서는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그냥 리액션만 열심히 하고 있다"고 멋쩍게 웃으며, 속으로는 "제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외국인 학교에 아들을 보낸다는 사실만으로 주변에서는 당연히 그가 영어를 잘할 것이라 여기는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기가 죽었다"고 표현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러한 사유리의 고백은 2020년 정자 기증을 통해 아들 젠을 품에 안고 '자발적 비혼모'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육아 여정에 또 다른 현실적인 과제가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당당하고 소신 있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그였지만, 아들의 교육 환경 속에서 마주한 영어 울렁증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평범한 엄마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방송에서는 늘 유쾌하고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는 그가 아들의 학교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세상 모든 부모가 겪는 다양한 고민과 애환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