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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의 영광?…'탈주범' 낙인 찍힐까 숨어버린 야당 지도자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베네수엘라의 야당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결국 시상식 무대에 서지 못했다. 10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시상식을 앞두고, 니콜라스 마두로 독재 정권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은신 중인 그의 참석 여부는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였으나, 끝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인류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가장 영예로운 자리마저 독재 정권의 억압으로 공석이 되면서, 노벨상의 권위와 베네수엘라의 암울한 민주주의 현실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됐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마차도의 시상식 불참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크리스티안 베르그 하르프비켄 노벨연구소 소장은 NRK와의 인터뷰를 통해 "마차도는 시상식 당일 현재 오슬로에 있지 않으며, 무대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확인했다. 대신 마차도의 딸인 코리나 소사가 어머니를 대신해 상을 받고, 마차도가 직접 작성한 연설문을 낭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르프비켄 소장은 "마차도의 현재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여, 그가 여전히 삼엄한 감시와 위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미 오슬로에는 마차도의 모친과 세 딸 등 가족들이 도착해 있어, 수상의 영광을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더했다.

 


마차도는 마두로 대통령의 독재 통치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이끌며 베네수엘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지난해 야당의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하며 마두로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지만, 마두로 정권은 부패 혐의 등을 씌워 그의 공직 출마 자격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출마를 가로막았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온 그는 지난 1월 9일 반정부 시위를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사실상의 은둔 생활을 이어왔다.

 

애초부터 마차도의 시상식 참석 여부는 그 자체로 중대한 정치적 함의를 지닌 시험대였다. 그가 수상을 위해 해외로 출국하는 순간, 이는 사실상 고국을 등지는 망명과 다름없는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 당국은 마차도에게 범죄 모의와 테러 혐의를 적용하며 "출국 시 '탈주범'으로 규정하겠다"고 공공연히 협박해왔다. 시상식 전날인 9일, 마차도가 참석할 예정이었던 기자회견이 돌연 취소되면서 이미 그의 불참 가능성과 함께 신변 이상설까지 제기된 바 있다. 결국 마차도는 노벨상의 영예 대신 독재 정권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으로 남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