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큐브

"12억이면 청년 표심이 올 줄 알았나"... 이준석이 폭로한 이재명 캠프의 '커리 영입 작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0대 대선 후보 시절,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스테픈 커리와의 화상 대담을 추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정 종교 단체인 통일교가 연결고리로 등장했으며, 섭외 비용으로 약 12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 논의된 정황이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해당 계획은 민주당 측이 먼저 통일교에 제안하며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인물을 통해 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취지를 설명했고, 이에 필요한 비용 역시 민주당이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통일교 내부 관계자들의 통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해당 보도가 나온 직후 즉각 반응하며 이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바로 전날 자신이 제안했던 '통일교·민주당 정치자금 특검'의 수사 범위를 하루 만에 더 넓혀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NBA 스타인 스테픈 커리를 섭외하는 데 8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거론된 사실을 언급하며, 대선이라는 중차대한 무대에서 나온 전략이라고 보기에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선거 승리를 위해 비상식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특히 이준석 대표는 당시 이재명 후보 캠프의 전략적 판단력에 대해 깊은 불신과 함께 조소를 보냈다. 그는 "스테픈 커리와 화상통화 한 번 하면 젊은 층의 표가 쏟아져 들어온다고 생각했던 걸까?"라고 반문하며, 선거 판세를 좌우할 핵심 전략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었다는 사실이 황당하고 우습기까지 하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이러한 비현실적인 판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논란의 중심에 있는 통일교에 손을 벌렸다는 점은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히 미숙한 전략의 차원을 넘어, 정치와 종교의 부적절한 유착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사안의 본질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강조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번 의혹 제기를 계기로 이준석 대표는 특검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르고 있다. 그는 스테픈 커리 섭외 시도 의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이재명 후보가 대선 기간 중 만났던 여러 국내외 명사들과의 만남 전반에 대한 의구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이 만남들 역시 누군가가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성사시킨 것은 아닌지 철저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이러한 의혹들을 모두 포함하여 특검법안의 수사 대상 범위에 명확하게 명시하겠다고 약속하며, 이번 사안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향후 발의될 특검법안의 내용과 그 파장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