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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 대화 vs 사적 사진 유출…이이경-폭로자, 이제는 '증거'로 싸운다

 배우 이이경의 사생활 의혹을 폭로했던 A씨가 조작된 대화 내용과 사적인 사진이 유포되고 있다며 법적 대응을 선언, 진실 공방이 2라운드에 돌입했다. A씨는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장문의 입장문을 내고, "특정 배우를 폭로한 이후 지속적인 협박을 받아왔으며, 이틀 전부터는 신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려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개설됐다"고 주장했다. 이 계정에는 어플로 조작된 카카오톡 대화 캡처와 동의 없이 유포된 사적인 사진이 게시되고 있으며, 이는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사생활 침해라는 것이 A씨의 입장이다.

 

A씨는 유포된 자료의 출처가 이이경 측일 수밖에 없다고 사실상 그를 겨냥했다. 조작된 대화에 사용된 '모자를 쓴 비행기 셀카'는 배우 본인과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사진이며, 제3자에게 공유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문제의 계정이 처음에는 부자연스러운 조작 대화 내용을 올렸다가 삭제한 뒤, 다시 흐릿하게 편집해 올리는 등 조작 정황이 명백하며 최초의 조작 화면을 이미 증거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일부 유출된 실제 대화 내용에는 자신의 가족 회사와 관련된 민감한 개인정보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단순 추측이나 제3자의 창작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라고 강조했다. 한 네티즌이 "맞고소 가나요"라고 묻자 "네 ㅎㅎ 맞고소 갑니다"라고 답하며 법적 다툼을 공식화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지난 10월 A씨가 이이경과의 사적인 대화 내용과 사진을 공개하며 시작됐다. 파장이 커지자 소속사는 즉각 "허위 사실"이라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이후 A씨는 사과문을 올리며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돈을 받거나 협박당하지 않았다"며 입장을 번복하더니, "AI가 아니어서 억울하다. 나쁜 놈을 피해자로 만들었다"며 추가 폭로까지 고민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대중의 피로감과 혼란만 가중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생활 논란의 여파는 이이경의 방송 활동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 그는 고정 출연하던 MBC '놀면 뭐하니?'와 MC로 합류 예정이던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연이어 하차했다. 최근 '아시아 아티스트 어워즈'에서 수상한 이이경은 "일기예보에 없던 우박을 맞는 느낌"이라며 논란을 직접 언급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SNL 코리아' 보고 있나. 저 이제 목요일 쉰다"며 '놀면 뭐하니?' 하차를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하하, 주우재 등 동료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프로그램의 중심인 유재석의 이름만은 언급하지 않아 또 다른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폭로전이 법적 다툼으로 비화되면서, 진실이 무엇이든 양측 모두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게 될 전망이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