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산업

이자 싸게 보이게 '꼼수' 부리면…금감원 칼 빼들자 대출업계 '초긴장'

 금융감독원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대출중개법인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2021년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이후 급격히 성장한 대출 중개 시장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해졌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소비자 기만 행위와 허술한 내부통제가 만연하다는 판단에서다. 금감원은 15일, 130여 개 대출중개법인의 금융소비자보호 총괄책임자(CCO)와 내부통제 담당자 등 190여 명을 소집해 워크숍을 열고, 법규 위반 사례를 공유하며 소비자 보호 중심의 강력한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을 주문했다. 이는 사실상 업계 전반에 보내는 엄중한 경고장으로, 향후 대대적인 관리 감독 강화를 예고한 셈이다.

 

이날 금감원은 소비자들이 가장 쉽게 현혹될 수 있는 '광고'와 관련된 구체적인 금지 지침을 제시했다. '최저 금리 보장'처럼 사실과 다르거나 소비자가 오인할 수 있는 절대적인 표현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이자율을 일 단위로 쪼개 표시하거나 실제보다 대출이자가 저렴해 보이도록 만드는 모든 '꼼수'에 제동을 걸었다. 또한, 단순히 연락처와 함께 '상담 제공'이라는 문구만 넣어 대출을 유도하는 형태의 업무 광고 역시 사전에 준법감시인의 심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못 박았다. 온라인 상담 시에는 소속과 성명이 명시된 증표를 제시해 정식 등록된 상담사임을 명확히 밝히고, 특히 온라인 상품 비교·추천 사이트에서 중개업체의 수수료 이익을 위해 상품 배열 순서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소비자의 검색 결과와 무관한 상품을 노출하는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금감원은 최근 검사 과정에서 적발된 대출중개법인들의 허술한 내부통제 실태를 적나라하게 공개하며 업계의 경각심을 촉구했다. 내부 규정상 소속 대출상담사의 법규 준수 여부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단 한 차례도 점검을 시행하지 않은 채 서류상으로만 점검한 것처럼 꾸민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한, 금융사로부터 승인받은 광고물을 언제부터 사용하고 언제 폐기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기록 관리조차 하지 않아 부적절한 광고물이 무분별하게 유통될 위험을 방치한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대출상담사를 대상으로 정기 교육을 실시한다고 규정해놓고, 실제 교육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나 증빙 자료가 전무한 업체도 적발돼 내부통제 시스템이 사실상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금감원은 이번 워크숍을 계기로 대출중개업계에 만연한 잘못된 영업 관행을 뿌리 뽑고, 금융소비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조직 문화가 확고히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지선 금감원 부원장보는 "소비자와의 이해상충 방지 체계를 구축하고 건전한 영업 질서를 확립하며, 스스로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는 일회성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대출 중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건전 영업 행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업체는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강력한 시그널로 해석된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