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32살 남성 10명 중 7명이 '나 혼자 산다'

 불과 5년이라는 짧은 시간 차이를 두고 태어난 청년 세대 사이에서도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는 비율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데이터처가 16일 발표한 '인구동태패널통계' 분석 결과, 동일한 나이라도 더 늦게 태어난 세대일수록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비율이 뚜렷하게 높아지는 현상이 공식 통계로 확인됐다. 이는 청년층이 결혼과 출산을 단순히 미루는 단계를 넘어, 아예 포기하거나 시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결과다.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강력한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이번 통계는 생애 주기상 결혼과 출산이 가장 활발한 30대 초반 인구를 시차를 두고 비교하는 방식으로 세대 간의 인식 변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2015년에 32세였던 1983년생 남성의 미혼 비율은 57.1%였으나, 불과 5년 뒤인 2020년에 같은 32세가 된 1988년생 남성의 미혼 비율은 67.6%로 10%포인트 이상 급증했다. 결혼을 하지 않으니 아이가 없는 비율 역시 같은 기간 73%에서 82.2%로 치솟았다. 여성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해, 31세 여성의 미혼율은 5년 사이 43.5%에서 54.7%로 11.2%포인트나 폭증하며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이들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비율 자체가 급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3년 내 결혼하는 비율이 남성은 24.1%에서 15.5%로, 여성은 28.4%에서 19.1%로 뚝 떨어졌다.

 


이처럼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육아휴직'이라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발견됐다. 첫 아이를 낳은 부모가 육아휴직을 사용했을 경우,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3년 이내에 둘째 아이를 낳아 '다자녀 가구'가 될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다는 사실이 데이터로 입증된 것이다. 2015년부터 2020년 사이 첫 아이를 낳은 상시근로자를 추적 관찰한 결과, 육아휴직을 사용한 남성의 46.4%가 3년 후 두 자녀 이상을 둔 반면, 육아휴직을 쓰지 않은 남성은 그 비율이 39.9%에 그쳤다. 여성의 경우 그 효과가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는데, 육아휴직을 쓴 여성의 다자녀 비율은 39.2%로, 미사용자(30.1%)보다 무려 9.1%포인트나 높았다.

 

육아휴직의 긍정적인 효과는 특정 계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거주 지역이나 소득 수준, 심지어 직장의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서 육아휴직 사용이 추가 출산으로 이어지는 공통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소득이 평균보다 낮거나 중소기업에 다니는 부모라 할지라도 육아휴직을 사용했을 때의 다자녀 비율이 미사용자보다 높게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만 보장된다면, 청년들이 자녀를 더 낳을 의향이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다. 저출산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육아휴직 제도의 실질적인 보장과 확대가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