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데이터가 너무 많다"…경찰도 혀 내두른 쿠팡 압수수색, 도대체 뭘 숨겼길래?

 사상 초유의 3370만 개 계정 정보 유출 사태를 맞은 쿠팡에 대한 경찰의 강제수사가 6일째 이어지며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경찰은 지난 9일부터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쿠팡 본사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현재까지 유출 경로와 침입자를 특정하는 데 필요한 핵심 자료의 약 60%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당초 쿠팡 측이 발표했던 4500여 명이라는 피해 규모가 실제로는 수천만 단위의 천문학적인 수치로 불어난 만큼, 이번 압수수색을 통해 사태의 전말과 함께 쿠팡의 관리 부실 책임 여부가 명명백백히 드러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경찰은 주말이었던 전날 하루를 제외하고 연일 수사관들을 투입하며 자료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5일 오전에도 수사전담팀 11명이 6일 차 압수수색 집행에 나섰다. 이처럼 압수수색이 장기화되는 이유는 쿠팡이 보유한 원본 데이터의 양이 워낙 방대해, 그 속에서 이번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만을 선별적으로 추출하는 데 상당한 물리적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르면 15일 중, 늦어도 16일에는 현장 압수수색을 마무리하고 확보된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디지털 포렌식 분석에 착수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경찰이 특정한 유력 용의자는 중국 국적을 가진 쿠팡의 전직 직원 A씨 한 명이다. 경찰은 A씨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절차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혀, 향후 인터폴 공조 등 국제 수사로 확대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와 동시에 쿠팡 역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해 피고발인 신분으로 전환됐다. 이는 단순히 외부 해커의 소행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 최대 이커머스 기업으로서 쿠팡이 고객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기술적·관리적 보호 조치 의무를 다했는지를 철저히 따져보겠다는 수사 당국의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아직 유출된 개인정보를 악용한 보이스피싱이나 금융 사기 등 2차 피해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찰은 범인이 최종 검거되어야만 정보가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구체적인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향후 경찰은 압수물 분석을 통해 정확한 침입 경로와 유출된 정보의 종류를 확정하고, 이 과정에서 쿠팡의 개인정보 보호 시스템에 법적·제도적 허점은 없었는지 등을 면밀히 들여다볼 방침이어서 수사 결과에 따라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