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 장손 박세현, 해병대 1323기 수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손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조카인 박세현 씨가 대한민국 해병대 병사 1323기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식 해병으로 거듭났다. 최고 권력자의 후손이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을 자원하여 마쳤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4일 경북 포항시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열린 수료식에는 세현 씨의 부모인 박지만 EG 회장과 어머니 서향희 여사가 직접 참석해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지켜봤다.

 

국방홍보원 KFN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수료식 영상에는 훈련을 마친 세현 씨가 아버지를 향해 힘찬 관등성명을 대며 거수경례를 올리는 감동적인 순간이 담겼다. 이 순간 세현 씨는 잠시 눈시울을 붉혔고, 박 회장은 경례를 받은 뒤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뜨겁게 포옹하며 아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최고 권력자 가문의 일원이지만, 훈련병으로서의 고난을 이겨낸 아들과 아버지의 진한 교감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이었다.

 

박세현 씨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중 지난해 가을 귀국하여 10월 27일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해병대는 강인한 훈련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만큼, 세현 씨가 편한 길 대신 스스로 가장 어려운 군 복무를 택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세현 씨는 이날 수료식에서 훈련 기간 동안 보여준 뛰어난 기량과 모범적인 자세를 인정받아 '미 해병대 장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훈련병에게 수여되는 상 중에서도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져 있어, 세현 씨가 훈련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음을 짐작하게 한다.

 

세현 씨는 과거 고모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 등에서 "보물 1호"라 칭하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의 수료식 참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박세현 씨의 해병대 자원입대는 그의 가문이 3대에 걸쳐 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조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군 대장으로 1963년 예편했으며, 아버지 박지만 회장 역시 육군사관학교 37기 출신으로 1986년 대위로 전역했다.

 

세현 씨의 해병대 복무는 이러한 가문의 군인 전통을 본인의 의지로 계승했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그는 이제 훈련소를 떠나 자대 배치를 받고 대한민국 해병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