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교권 붕괴 주범' vs '최소한의 존엄'…결국 전쟁으로 끝나는 서울 학생인권 논쟁

 서울시의회가 이미 대법원에서 심리 중인 '서울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또다시 가결시키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국민의힘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서울시의회는 16일 본회의를 열어 사실상 동일한 내용의 폐지안을 재차 통과시켰다. 이는 지난해 4월 가결된 폐지안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이 재의를 요구하고 대법원이 집행정지까지 인용해 효력이 멈춘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같은 안건을 밀어붙인 것으로, 행정력과 예산을 낭비하고 사법부의 권위를 무시한 처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번 폐지안 처리 과정은 시작부터 파열음으로 가득했다. 해당 안건은 여야 합의 없이 최호정 의장이 직권으로 상정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에 반발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반대표를 던지거나 아예 본회의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항의의 뜻을 표했다. 표결 결과는 재석 86명 중 찬성 65, 반대 21로, 국민의힘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지며 폐지안을 강행 처리했다. 이는 지난달 교육위원회에서 기습적으로 안건을 상정해 통과시킨 데 이은 일방적인 의회 운영이라는 비판에 더욱 불을 지폈다.

 


양측의 입장 차는 평행선을 달렸다. 국민의힘은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권리만 과도하게 강조해 교권 붕괴를 초래하는 등 시대에 맞지 않는 갈등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을 특별대우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하자는 기본적 요구이며, 교권 침해의 원인으로 왜곡되고 있다고 맞섰다. 2012년 제정되어 학생이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조례의 근본 취지를 두고 양측의 해석이 극명하게 엇갈린 것이다.

 

폐지안이 통과되자마자 서울시교육청은 즉각 재의를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의회 재적 의원 111명 중 75명이 국민의힘 소속이라, 재의 요구는 사실상 요식행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교육청은 또다시 대법원에 집행정지 신청과 함께 본안 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동일한 조례 폐지안 두 건이 동시에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셈이다. 학교 현장의 혼란과 행정력 낭비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리한 조례 폐지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